섹션 1_플랫폼
Section 1 | Platform
철로와 열차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철도영화들
플랫폼 섹션에서는 열차와 영화의 관계를 영화사적 맥락에서 조망할 수 있는 고전 작품들을 소개한다. 고전 영화에서 기차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영화 속 인물들의 일상 한켠에 기차가 익숙한 배경처럼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에서 지하철이나 기차역과 같은 공공장소는 소매치기가 활동하기에 최적화된 공간이다. 브레송은 기차역을 인물의 심리적 무대가 아니라, 손의 자율적 의지가 작동하는 촉각적 공간으로 형상화한다. 리옹 역에서 벌어지는 소매치기 장면은 손의 클로즈업으로 파편화되어 전체적 맥락을 구성하기는 어렵지만, 대신 색다른 공간적 체험을 가능케 한다. 잉마르 베리만의 <침묵>에서 기차는 낯설면서도 친숙한 도시로 향하는 여행의 매개이다. 관객은 요한의 시선을 따라 기차 창밖 풍경을 통해 세상을 관찰할 수 있다. 한편 루이스 브뉘엘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 기차는 긴 여정을 함께하는 낯선 이들이 서로의 사연을 나누기에 최적의 시공간을 제공한다. 스페인 세비야에서 파리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중년 신사 마티유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흥미롭고도 기묘하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붉은 살의>에서 낡은 증기기관차는 근대 일본 사회의 억압과 남성 중심적 질서를 상징한다. 특히 기차 소리는 여주인공과 연결되어 남성의 침입과 위협을 암시하는 청각적 장치로 반복된다. 그러나 눈보라 속에서 등장하는 후반부의 기차는 여성 주체의 자유를 표현하는 것으로 변모한다.
소매치기
Pickpoket, Pickpocket
로베르 브레송 감독
프랑스 | 1959 | 76분 | 극영화 | B&W | 15세이상관람가
마르탱 라살, 마리카 그린, 장 펠레그리 출연
제작_아녜스 드라에 | 각본_로베르 브레송 | 촬영_레옹스-앙리 뷜레 | 편집_레이몽 라미
미셸은 전설적인 소매치기 조지 배링턴의 전기를 읽으며 그 세계에 매료된다. 결국 소매치기를 시작하게 된 그는 처음엔 두려움에 떨지만 이내 죄의식이 무뎌진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여전히 범죄를 저지르던 미셸은 이웃 잔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하지만 거절당하고 이탈리아로 떠난다. 1년 후, 돌아온 미셸은 처음 범죄를 저지른 경마장에서 다시 소매치기를 시도한다.
✢ 프로그램 노트
미셸은 자신의 범죄를 부정하지 않는다. 첫 내레이션에서 미셸은 자신의 선택을 자백한다. 그가 소매치기를 선택한 것은 물질적인 탐심이 아닌 그가 경험한 일종의 무중력 상태와 ’세상을 지배했다‘고 느끼는 오만함 때문이다. 하지만 우회의 과정을 거쳐, 그를 ‘기이한 길’로 인도하는 은총 또한 스스로 선택한 결과다. 은총과 자유의지의 복잡한 변증법이 여기서 작동한다. 미셸에게 도둑질은 일종의 도덕적 선언으로, 그는 소매치기 기술을 연마하고 공모하며, 경찰서장을 찾아가 도전하는 듯한 행동까지 한다. 지하철과 기차역과 같은 공공 장소는 소매치기 활동에 최적화된 공간이다. 브레송은 이 공간을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라, ‘손의 자율적 의지’가 작동하는 공간, 즉 촉각적 공간으로 구성한다. 리용 역에서 벌어지는 소매치기 장면은 그렇게 손의 클로즈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감옥 철창 사이로 미셀과 잔이 만나는 장면은 구원의 가장 희망적인 시선으로 보여준다. 그 시선은 인간적 사랑과 아가페적 사랑의 경계에서 작동한다. 미셸은 단지 잔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 너머를 바라본다. 수많은 고통스럽고 모호한 시선과 응시를 거쳐, 영화 내내 관객이 그와 함께 걸어온 그 기이한 한 길을 상징한다.
로베르 브레송 (Robert Bresson, 1901.09.25. ~ 1999.12.18.)
1943년 <죄악의 천사들(Les Anges du Pêche)>로 장편 데뷔한 로베르 브레송은 ‘배우-모델’ 기법과 생략의 활용 등 미니멀리즘 형식을 통해 신의 은총과 개인의 자유의지에 관한 질문을 던져왔다. 50년간 장편 영화 13편만을 제작했지만, 후대 영화인들에게 영화사상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장 뤽 고다르는 “도스토옙스키가 러시아 소설이고 모차르트가 독일 음악인 것처럼, 브레송은 프랑스 영화 그 자체이다.”라 말했다.
침묵
Tystnaden, The Silence
잉마르 베르히만 감독
스웨덴 | 1963 | 96분 | 극영화 | B&W | 청소년관람불가
잉그리드 툴린, 구넬 린드블롬, 예르겐 린드스트뢰 출연
제작_알란 에케룬드 | 각본_잉마르 베르히만 | 촬영_스벤 뉘크비스트 | 편집_울라 뤼게 | 음악_이반 렌리덴
전쟁 직전의 유럽, 에스터와 그의 여동생 안나, 그리고 안나의 어린 아들 요한은 여행 중 악화된 에스터의 병으로 인해 낯선 도시의 호텔에 머무른다. 발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에스터는 곁에 있어 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지만 안나는 밖을 쏘다니고 요한은 호텔 복도를 배회한다. 하지만 그들을 구원해 줄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 프로그램 노트
가상의 낯선 도시에 기차를 타고 도착한 두 자매는 그 나라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언어가 소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같은 언어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매 사이의 소통은 점점 극단적인 단절로 치닫는다. 더구나 언니 에스터는 직업이 번역가이다. 여러 언어를 구사하지만, 정작 어떤 언어로도 소통할 수 없으며 깊은 고립감을 느낀다. 지적이고 사색적이지만 병약한 에스터는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동생 안나와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전쟁을 앞둔 듯 불안한 이 낯선 도시의 분위기처럼, 자매 사이에는 설명하기 힘든 긴장과 위기감이 감돈다. 오직 말없는 아이 요한만이 도시와 호텔의 구석구석을 떠돌며 이들을 관찰한다. <유리를 통해 어렴풋이>(1961), <겨울 빛>(1963)과 함께 이 작품은 ‘신의 침묵 삼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주제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 소외의 문제, 아이의 시선으로 본 세계, 파괴적인 성적 긴장감을 담아내며, 형식적으로는 집약적이고 상징적인 구성, 간결한 대사, 그리고 스벤 닉비스트의 촬영으로 더욱 도드라지는 얼굴의 클로즈업 등, 베리만 특유의 영화적 특징들이 집약되어 있다. 특히 에스터와 안나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장면은 이후 세대의 시네아스트들에게 재해석되어 패러디와 오마주로 이어졌다.
잉마르 베리만 (Ingmar Bergman, 1918.07.14. ~ 2007.07.30.)
유년기부터 연극을 하였으며, 1941년 연극 <카스퍼의 죽음(Kaspers död)>으로 주목받아 영화계에 데뷔했다. 관습적인 연출 기법에 구속되지 않고 영화 언어의 혁신을 주도했던 베리만은 신의 존재와 인간의 고통이란 형이상학적 문제를 영화에 녹여내어 당대의 화두였던 ‘실존주의’와 맞물려 20세기 최고의 영화감독으로 떠올랐다. 1976년 예술적 공헌도가 큰 문화인에게 수여하는 ‘괴테상’을 수상했다.
붉은 살의
赤い殺意, Intentions Of Murder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일본 | 1964 | 150분 | 극영화 | B&W | 15세이상관람가
하루카와 마스미, 니시무라 코우, 츠유구치 시게루 출연
제작_타카기 마사유키, 토모다 지로 | 각본_후지와라 신지, 하세베 케이지, 이마무라 쇼헤이 | 촬영_히메다 신사쿠 | 편집_탄지 무츠오 | 음악_마유즈미 토시로
비천한 집안 출신의 사다코는 어린 아들에게도 무시당하는 가족의 천덕꾸러기다.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집에 침입한 남성에게 강간을 당한 사다코는 기차에 몸을 던지려 한다. 하지만 사다코는 번번이 죽지 못할 이유가 떠올라 되돌아온다. 이후, 그를 범한 히라오카가 사다코 앞에 나타나 애정을 갈구하고, 그를 떼어내려 할수록 억눌린 욕망이 되살아남을 느낀다.
✢ 프로그램 노트
이마무라 감독의 여주인공들은 생명력이 넘친다. 리비도적 충동에서 비롯된 그녀들의 욕망은 억압과 상처를 겪지만, 회복력 있고 강하게 저항하며 저돌적으로 발현된다. 감독은 성과 신체에 대한 관심을 통해 일본 사회의 성별 불평등과 근대적 억압 구조를 비판한다. 영화 속 기차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주요한 모티프로 기능한다. 낡은 증기기관차는 근대 일본 사회의 억압과 남성 중심적 질서를 상징하며, 기차 소리는 사다코의 집과 연결되어 남성의 침입과 위협을 예고하거나 암시하는 청각적 장치로 반복된다. 특히 슬로우 모션과 꿈 장면에서 기차는 초현실적 이미지로 등장하며 폭력과 불안을 시각화한다. 사다코가 히라오카와 함께한 불안한 여행과 기차 속의 연기는 그녀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보여준다. 그러나 후반부, 눈보라로 인해 기차 여행이 좌절되는 순간에는 사다코가 더 이상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기차를 통해 자유를 향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는 남성과 기차가 상징하는 억압적 연결고리를 넘어선 여성 주체의 변화를 표현한다.
이마무라 쇼헤이 (今村 昌平, Shôhei Imamura, 1926.09.15. ~ 2006.05.30.)
오즈 야스지로의 조감독으로 영화경력을 시작했다. 기존 일본영화의 섬세하고 절제된 표현에 반감을 가지며 닛카츠로 터전을 옮긴 후 <도둑맞은 욕정(盜まれた欲情, 1954)>으로 데뷔하여 1960년대 일본 뉴웨이브를 이끌었다. 그의 작품은 하층민의 삶과 욕망에서 분출되는 원시적 에너지를 사실적으로 포착해 ‘인류학적’이라 수식되곤 한다. 그럼에도 현실과 허구를 능숙하게 혼합하여 일본 영화사에 빠질 수 없는 거장으로 칭송받는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
Cet Obscur Object Du Desir, That Obscure Object of Desire
루이스 부뉴엘 감독
프랑스, 스페인 | 1977 | 103분 | 극영화 | Color | 청소년관람불가
페르난도 레이, 카롤 부케, 앙헬라 몰리나 출연
제작_세르주 실베르만 | 각본_루이스 부뉴엘, 장-클로드 카리에르, 피에르 루이스 | 촬영_에드몽 리샤르 | 편집_엘렌 플레먀니코프
연일 테러가 발생하는 스페인 남부 세비야, 백발의 부유한 신사 마티유는 파리행 열차에 오른다. 열차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 아름다운 여인이 마티유를 찾아 열차에 오르려 하고, 그는 느닷없이 여인에게 양동이 한가득 물을 붓는다. 충격적인 그의 행동에 승객들이 비난의 눈길을 보내자, 마티유는 차분히 자신이 겪은 기이한 사연을 털어놓는다.
✢ 프로그램 노트
기차는 긴 여정을 함께하는 낯선 이들이 서로의 사연을 나누기에 더없이 좋은 시공간을 제공한다. 스페인 세비야에서 파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중년 신사 마티유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흥미롭고도 기묘하다. 그는 욕망하는 여인 콘치타를 만났으나,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브뉘엘 감독은 이 콘치타 역에 서로 상반된 개성을 지닌 두 배우를 동시에 캐스팅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선보였다. 마티유는 카롤 부케가 연기하는 우아하고 지적인 콘치타와, 앙헬라 몰리나가 연기하는 관능적이고 외향적인 콘치타 사이에서 열정과 좌절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플래시백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곳곳에서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을 불쑥 끼워 넣으며, 브뉘엘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장치를 환기시킨다. 미장아빔(mise en abyme)을 통해 마티유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콘치타에 의해 조종된다. 마티유는 그러므로 여성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브뉘엘은 이 마지막 영화에서 평생 그를 사로잡았던 집착과 관심사―욕망, 에로티시즘, 성, 죄, 종교, 가족, 사회적 위계―를 다시 불러낸다. <비리디아나>나 <트리스타나>에서 이미 다룬 바 있는 나이 든 남성과 젊은 여성의 관계라는 주제 역시 되풀이된다. 무엇보다 욕망을 충족할 수 없는 상황은 브뉘엘 영화 전반에 일관되게 흐르는 모티프다.
루이스 부뉴엘 (Luis Buñuel, 1900.02.22. ~ 1983.07.29)
프리츠 랑의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를 일종의 최면 행위라 생각했던 부뉴엘은 연상적 서사와 초현실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어린 시절 경험한 가톨릭적 엄격함과 상류층의 위선을 향한 회의가 강렬히 드러나 그의 작품은 외설과 신성모독이라는 논란이 따라다녔고, 이로 인해 미국, 멕시코 등지를 오가며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대담함은 표현의 자유를 확장하며 영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